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엘리자베스 1세 (문단 편집) === 성장 배경 === 어릴 적엔 첫자식이자 무사히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라 총애받았던 언니 [[메리 1세]]와,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로 태어나 사랑받았던 남동생 [[에드워드 6세]]처럼 엘리자베스도 한동안 귀여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렇게나 믿었던 [[앤 불린]]이 아들을 낳지 못한단 사실[* 의학 및 생물학적 지식이 약했던 전근대 시기에는 특정한 여자가 아들을 낳지 못하는 이유를 그 여성의 탓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많았으나, 현대 과학적 지식으로는 그러한 인식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난임은 여러 가지의 요인이 작용하며, 특정 성의 아이를 임신하지 못하는 증상은 아직도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분야이다. 현대에 들어 성별을 결정짓는 건 남자 쪽의 염색체라고 밝혀졌다.]에 [[헨리 8세]]는 크게 실망하고, 점점 아버지의 관심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녀 자신은 아버지에 대해 가족으로서의 애정은 없었지만 군주로서의 롤 모델로는 존경했던 듯하다고. 거기다 생모 [[앤 불린]]은 말하자면 불륜, 신분도 (공주 출신인 캐서린 대비) 상대적으로 낮은 '상간녀'이미지로서 백성들의 지지도 별로 받지 못했다.[* 세간에서는 불합리한 처사를 당한 조강지처 [[아라곤의 카탈리나]]에 대한 동정 여론이 높았다. 그녀가 폐위되어 궁정 밖으로 쫓겨났을 때, [[헨리 8세]]의 눈치를 보던 귀족들과는 달리 백성들은 연도에 모여 여전히 캐서린을 '우리 왕비님'이라고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이런 여론에는 앤의 고집 센 성격과 좋지 못한 대인관계도 한몫 했다. 이후 캐서린이 사망했을 때 심장이 검게 변해있자 백성들 간에는 "앤 불린이 캐서린 왕비를 독살한 거다!" 라는 주장까지 나왔을 정도(현대에는 심장에 암이 생겼던 것으로 보고 있다.)] 결국 엘리자베스는 어머니 앤 불린이 참수형에 처해지는 슬픔을 겪게 되고, 과거 자신의 입지를 위해 이복언니 [[메리 1세]]가 공주작위와 왕위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사생아로 전락했던 것처럼 자신도 작위와 계승권을 잃고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된다.[* 같은 처지였던 이복언니 [[메리 1세]]는 생모 [[아라곤의 카탈리나]]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메리 역시 백성들의 동정을 받았으나, 엘리자베스는 [[앤 불린]]이 참수당하자 백성들이 인과응보라며 비웃었을 정도로 생모에 대한 평판이 나빴기 때문에 그렇게 동정받지도 못했다.] 그러나 불우한 환경에서도 엘리자베스는 총명하며 공부를 좋아했고, 교양인이었던 헨리 8세의 6번째 왕비이자 의붓 어머니인 [[캐서린 파]] 아래에서 열심히 교양을 습득했다. 당시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여아들도 남자 못지 않게 교육시키는 풍토가 있어 엘리자베스 역시 당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사사해 각종 학문을 배웠다. 1547년에 부왕인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의붓어머니인 [[캐서린 파]]와 잠시 함께 살았다. 파는 헨리 8세와 사별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그의 3번째 왕비였던 [[제인 시모어]]의 오빠 토마스 시모어와 재혼했기에 엘리자베스는 시모어와도 함께 살게 됐다. 그런데 야심만만한 시모어가 왕위계승권을 가진 엘리자베스에게 추근대는 일이 생겼다. 이를 곧 눈치 챈 파는 그 즉시 엘리자베스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자칫하면 왕위계승권자로서의 명예를 크게 훼손당할 수도 있는 치명적인 추문이었으나 그때 엘리자베스는 고작 14세의 소녀에 불과했으며, [[캐서린 파]]가 엘리자베스를 진심으로 걱정해 조언해 주었기에 엘리자베스가 시모어와 절연함으로써 이 추문은 한때의 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추문에 대해 엘리자베스도 잘 생긴 시모어에게 반했기 때문에 시모어가 자신을 희롱할 때 거절하지 않고 호응했다는 설도 있다. 게다가 이 추문이 났을 때 [[캐서린 파]]는 시모어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캐서린 파는 심한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신분에 따르는 책임과 예의 때문에 의붓딸과 남편의 추문을 묻어 두어야 했으나, 결국 아이를 [[출산]]하고 [[산욕열]]로 죽을 지경에 처해서야 자신의 고통을 모두 드러내며 두 사람에게 폭언과 저주를 퍼부었다는 일화도 있다.] 4살 차이가 나는 이복 남동생 [[에드워드 6세]]와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고 이복언니 [[메리 1세]]와도 어린 시절에는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앤 불린]]의 딸임에도 동생에게 애정을 쏟았지만 점차 정치적 입장과 종교의 차이로 인해 사이가 벌어졌다.[* [[메리 1세]]는 공공연하게 엘리자베스가 [[헨리 8세]]의 친딸이 아닐 거라고 말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헨리 8세]]의 외모를 쏙 빼닮은 건 메리가 아닌 엘리자베스라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당장 헨리 8세의 초상화와 엘리자베스 1세의 초상화를 비교해 봐도, 붉은 머리색깔부터 얼굴까지 헨리 8세를 쏙 닮은 걸 볼 수 있다. 참고로 [[메리 1세]]가 엘리자베스의 친부라고 믿은 사람은 [[앤 불린]]이 처형당할 때 같이 엮여 처형당한 사람 중 하나인 궁중악사 마크 스미튼(Mark Smeaton).] 메리 1세의 재위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는 모반 혐의로 [[런던 탑]]에 감금당하며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으나,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한데다 다행히 증거가 없어 풀려날 수 있었다. 이렇게 [[메리 1세]]는 엘리자베스와 애증어린 줄다리기를 했으나 결국 죽음을 눈 앞에 두자 할 수 없이 헨리 8세의 마지막 남은 후손인 엘리자베스를 후계자로 지명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에는 아내인 [[메리 1세]] 사후에 처제인 엘리자베스와 재혼해 잉글랜드까지 통치하려는 [[펠리페 2세]]의 강한 의지가 작용했다는 말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